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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책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 박완서] 인생 어른이 들려주는 이야기, 사랑 받은 삶에 대한 이야기

한동안 젊은 작가 수상집을 읽던 때였다. 물론 너무 훌륭한 작품들이었고 소재들도 신선했지만 어쩐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퀴어 요소와 허세처럼 느껴질 정도로 담백한 아이러니한 문장들에 조금씩 실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완서 작가의 책을 읽고 노련한 작가의 글에 큰 감동을 받았다.


독서 노트 

겨울의 희망도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봄이고, 봄을 믿을 수 있는 건 여기저기서 달콤하게 속삭이는 봄에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섭리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봄이 다가와서 느껴지는 몽글몽글한 그 좋은 기분을 이렇게 성숙하고 단아하게 표현할 수 있다니. 노련한 작가의 글솜씨가 느껴진다.


나는 손님을 가장 불편하게 하는 것은 지나친 공경과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 (중략)
필요한 것이 알맞게 갖춰져 있고 홀로의 시간이 넉넉히 허락된 편안한 내 방이 언제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아릿한 향수와 깊은 평화를 느낀다.

과하게 친절한 서비스는 너무 감사하지만 몸 둘 바를 모르게 할 정도로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그렇게 느끼는 내가 사회성이 너무 부족하고 친절을 친절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꼬여있는 사람이라고 자책을 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사랑받은 어른이 지나친 공경과 관심이 온전히 좋게만 받아들일 수 없다고 알려주는 것 같아 위로가 되었다. 


꿈을 꾸지 않는 잠을 칙칙한 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꿈을 꾼 잠은 이 일러스트처럼 다채롭고 따뜻한 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거의 매일 꿈을 꾸는 나는 잠을 설쳤다고 생각했다. 관점을 바꾸면 내 잠, 내 밤은 여러가지 색채를 가진 생동감 넘치는 밤이될 수 있었다. 내 잠과 밤처럼 모든 것이 그럴 것이다. 내가 보기에 따라 그 색깔이 다를 것이다 


밤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어릴 때나 나이가 든 지금이나 그대로다. 그래서 달을 보면서 고향을, 부모님을, 친구를, 그 때 그 시절을 떠올리나보다. 그래서 달이라는 단어가 그토록 낭만적으로 들리는지도 모르겠다. 


학교 갔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 간혹 어머니가 집에 안 계시면 그것을 대문간에 들어서자마자 알아맞힐 수가 있었다. 집 안 전체가 썰렁했다. 썰렁하다는 건 실제의 기온氣溫과는 상관없는 순전히 마음의 느낌이었고 이 마음의 느낌은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다.

엄마가 없는 집의 썰렁함은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온도를 되돌릴 수 없을 때가 오는게 너무 두렵다. 엄마의 온기가 차갑고 우울한 나를 따뜻하게 만들었다.

오늘도 엄마는 내 저녁 밥을 걱정한다.

돈 벌어서 너가 하고싶은 데 써라. 건강한 밥 먹어라. 많이 먹어라. 

내 온 몸을 만들어 준 엄마는 내 정신과 생각 보이지 않는 것들도 만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