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책

[오래 준비해온 대답 - 김영하] 무계획에서 얻어낸 삶의 진리, 그 위를 넘실대며 살아가는 인생


1회독

믿고 보는 김영하의 여행 수필이었다. 안정된, 심지어 꼭대기 쯤에 도달해 있는 서울의 삶을 정리하고 삶의 거처를 옮기는 그 용기가 무엇보다 가장 존경스러웠다. 안정적인 것을 추구하는 나에게 절대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결심이었다. 그리고 그 옆을 묵묵히 지키는 김영하 작가의 아내는 그 둘 사이의 사랑과 믿음이 얼마나 확고한지 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정말 괜찮은 사람인 김영하는 정말 멋진 사랑을 하고 있구나.

이탈리아의 지명이나 관광 명소들의 이름은 너무 어려워서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기록하고 들려주는 이탈리아의 모습은 내가 좋아하는 영화 <루카>와 비슷하다. 뜨겁지만 건조해서 끈적거리지 않는 내가 좋아하는 날씨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고 일상의 소소함을 누리고 있는 모습이 자주 묘사된다. 그만큼 성격 급한 내가 가면 그저 이방인일 뿐이라는 걸 잘 알아서 평생 느껴볼 수 없을 것 같은 경험을 이 책을 통해서 할 수 있어서 만족했고 좋았다.

인생을 살다.

아름답게 묘사되는 이탈리아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마지막에 김영하 작가의 아내가 남긴 말이 가장 인상 깊다. 김영하 작가의 아내는 나와 완전히 같은 생각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다가올 시련이나 고통을 감당할 수 있도록 미리 그 일을 걱정하고 염려한다는 것이다. 실망하는 것이 싫어 최대한 기대치를 낮추려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는 삶을 사는 나와 아주 유사한 생각이다. 이런 생각을 내가 좋아하는 작가와 가장 가까운 인물이 한다는게 좋았다. 내가 영 잘못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아내분은 우여곡적 많은 이번 여행을 통해서 그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고 한다. 계획대로 굴러가는게 거의 없었던 이탈리아 여향을 통해 인생은 계획대로 굴러가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망하지도 슬프지도 않으니 적절히 그 순간을 즐기면 된다는 이야기를 해준 것 같다. 어차피 모든 것을 대비할 수 없다면 그 때의 순간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온 마음으로 느끼면 그거야 말로 정말 인생을 ‘살았다' 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나에게

요 며칠간 내 인생의 꽤나 큰 시련이었다. 강변역 오피스텔 계약에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문제가 해결된다 한들 이런 문제를 유발한 임대인을 전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직 돌려받지 못한 가계약금을 가지고 부동산과 임대인, 은행을 오가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돈이 걸리니까 사회 초년생이라고 봐주는건 없었다. 그냥 힘들었다. 나에게 좋지 않은, 아니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문자가 올 때마다 심장이 너무 쿵쾅거렸다. 부동산에 ‘부'자만 보여도 심장이 쿵쾅대고 손이 떨렸다. 숨이 가빠지고 몸이 뜨거워졌다. 이런 일이 왜 내게 일어났을까 하는 생각에 스스로를 구덩이로 몰고 있었다. 역시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게 없다. 내 계획대로라면 계약을 무사히 성사하고 입주 전까지 오늘의 집에서 가구들을 둘러보며 집을 꾸밀 계획을 거창하게 세우고 있었어야 한다. 이런 쓰레기같은 임대인을 만나는건 내 계획에 없었다. 그래서 더 스트레스 받고 힘든가 싶지만 사실 그건 아니다. 그러니까 그냥 가계약을 했을 때는 더 이상 집을 보러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기뻐하면 됐고, 가계약금을 가지고 다툴 때는 온 힘을 다해 임대인을 욕하고 짜증내고 어른스럽게 이 싸움에 맞서면 되는 것이다. 계산하지 말고, 예상하지 말고, 계획하지 말고, 인생을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