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노트
파도 속에 발을 담그며 불꽃처럼 터지는 초록빛 생물발광*을 일으키고는 했다.
*반딧불이처럼 생물이 화학작용을 통해 스스로 빛을 내는 것. 야광충이 많은 밤 해변에서는 바닷물에 손이나 발을 담그면 야광충들이 발하는 푸른빛을 볼 수 있다.
나도 생물 발광을 일으키는 파도에 발을 담그며 해안을 거닐고 싶다.
분류학 용어로 모든 표본을 “모식模式, type”이라고 하는데, 최초의 신성한holy 모식은 영광스럽게도 “완모식完模式, holotype”이라 부른다.
완모식은 같은 종이라 할지라도 절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다고 하는 점이 두렵기도 하고 잔인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고작 이 규칙 한 주 때문에(?) 완모식이라고 불리는 어떤 표본을 일어버리면 그 표본의 완모식은 영원히 상실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완모식을 상실한 경우, 이를 대체하는 것은 신모식 neotype이라는 하위의 지위를 갖는다고 한다. 완모식이 뭐길래.. 신모식에게 너무 잔인하다. 한번쯤은 완모식을 정말로 대체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진화가 우리에게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은 “우리는 실제보다 더 큰 힘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세상이 기본적으로 냉담한 곳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성공은 보장되지 않고, 수십만 명을 상대로 경쟁해야 하며, 자연 앞에서 무방비 상태이고, 우리가 사랑한 모든 것이 결국에는 파괴될 것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작은 거짓말 하나가 그 날카로운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낼 수도 있고, 인생의 시련 속에서 계속 밀고 나아가도록 도와줄 수도 있으며, 그 시련 속에서 가끔 우리는 우연한 승리를 거두기도 한다.
정리하자면 삶은 꽤나 불행한 것임에도 우리는 잘 살아가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실제로 가지고 있는 힘보다 스스로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음(혹은 착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믿음은 진화가 인간에게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이라고 한다.
비관적인 나도 이렇게 버둥거리는 걸 보면 스스로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릿Grit : 끈질긴 투지
“긍정적 피드백”이 없는데도 “매우 장기적인 목표”에 로봇처럼 뛰어들게 해주는 것,13 그릿. 머리로 벽을 반복적으로 들이받을 수 있는 능력.
오랫동안 나의 notion의 가장 눈에 띄는 공간에 적어둔 단어 Grit, 긍정적인 피드백이 없어도 까마득해 보이는 목표에 로봇처럼 무식하게 뛰어들 수 있는 능력.
8장에서 ‘자기기만’의 양면성에 대해 다룬다. 소위 자존감이 아주 높은 사람들이 보이는 특성을 자기기만이라고 표현해왔다고 한다. 그리고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어쩐지 괴자 같더라니 자기 기만이 아주 심한 편이라고 한다.
자기기만은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일을 해낼 수 있게 만드는 힘을 주기도 하지만 터널시야를 만들어 본질을 보지 못하고 착각 속에서 큰 실수를 할 수도 있게 만드는 양면성을 가진다. 이 장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그런' 인간이라는 것을 몰랐다.
우리가 도달한 가장 높은 발전 단계에서도, 만약 당신이 “부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이라면 정부는 당신을 집에서 끌어내 당신의 배를 칼로 긋고 당신의 혈통을 끊어버릴 권리를 지금도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도달한’ 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높은 단계라고 표현한 점이 좋다. 그러니까 인간들은 아직 고등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준다. 겨우겨우 노력해서 도달한 결과가 누룽지 수준. 이 법이 아직도 실존하고 실제로 정신병원 교도소에 있는 부적합하다고 판단된 여성들의 의사에 반하여서라도 시행된다는게 놀랍다. 이게 정말 현재 이야기인지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놀랍고 어이없다. 이제야 미국의 인종차별이 이해가 간다. 우생학이 미국 사회에 끈덕지게 눌러 붙어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어류”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경멸적인 단어다. 우리가 그 복잡성을 감추기 위해, 계속 속 편히 살기 위해, 우리가 실제보다 그들과 훨씬 더 멀다고 느끼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다.
(중략) ...
어떤 인지 과제에서 동물들이 우리보다 뛰어나다면—예를 들어 특정한 새 종들은 수천 개의 씨앗이 있는 정확한 위치를 기억할 수 있다—그들은 그것을 지능이 아니라 본능이라고 치부한다. 이와 같은 수많은 언어적 수법을 드 발은 “언어적 거세”라고 표현했다.39 즉 그것은 우리가 언어를 사용해 동물들의 중요성을 박탈하는 방식이자, 우리 인간이 정상의 자리에 머물기 위해 단어들을 발명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제목의 비밀이 드디어 풀렸다. 조금은 지루하고 예측 불가능한 책의 초반 줄거리는 결국 인간들에게 따끔하게 해줄 한마디에 도달하기 위해 주절거리고 있었던거다. 물고기, 어류는 없다. 물 속에는 다양한 종들이 모여 살고, 그들은 물에 살기 좋게 비늘을 가지도록 진화해서 비슷한 외형을 가지게 된 것인데 인간이 자신들의 무지를 감추려고 세상의 모든 종들을 손에 쥔 양 물고기라고 치부해버렸던 것이다. 그러니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지를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종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어떻게든 인간을 쑤셔 넣으려고 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발자국이 초래한 결과였다. 역겹다.
해왕성에서는 다이아몬드가 비로 내린다는데.
신기하다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이 책의 부제를 뒤늦게 알았다. 에필로그까지 다 읽은 시점에 알게 되어서 오히려 좋았다. 책의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경악과 감동, 충격,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생각 없는 내가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준 책.
너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까 니 멋대로 살아라.
...
우리의 무의미함을 직시하고, 그런 무의미함 때문에 오히려 행복을 향해 뒤뚱뒤뚱 나아가...
나는 이미 내가 중요하지 않고 이 세상에 무의미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 약속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희망을 품는 비결, 가장 암울한 날에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비결, 신앙 없이도 믿음을 갖는 비결
룰루 밀러는 데이비스 스타 조던이 이런 비결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나도 그런 기대가 필요하다. 아주 많이.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자신이 오랜 세월을 바쳐 모아온 표본들을 한 순간의 지진으로 대부분을 잃어버렸지만 그 순간 절망하지 않고 너무도 태연하게 그 중에 살릴 수 있는 것들에 이름표를 바느질하는 길을 갔다. 글에서는 그가 바늘을 칼처럼 휘둘렀다고 표현했다. 그가 어떤 악행을 저질렀든 절망에서 극복하는 힘은 존경할만 하다.
손가락 마디를 우두둑 꺾거나 뭉친 목 근육을 풀고 지구의 좋은 공기를 좀 들이마신 다음, 숨을 내쉬듯 최초로 그 생물의 이름을 발음했다. 아고노말루스 요르다니. 그러면 단지 그 행위만으로 새로운 종이 탄생했다.
그 사람이 "나는 이 세상에 아주 위대한 업적을 남길거야!" 하는 각오로 눈이 불 타오르고 있는 모습이 눈 앞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2회독을 할 때에는 이 책의 줄거리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작가의 문장 실력이 눈에 띄었다. 간결한 문장으로 익숙한 세상의 모습이지만 너무 익숙해서 글로 표현할 생각을 해본 적 없는 그런 장면들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예를 들어 이런 표현도 있었다.
비명을 지르는 듯한 도시의 뜨거운 빛이 창을 뚫고 들어왔다.
도시의 화려한 불빛이 불투명한 창으로 흩어지듯 들어오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라면, "도시의 빛이 filter: opacity(0.45); 정도의 스타일을 적용한 채로 창문에 드리웠다."라고 표현할지도 ㅋㅋㅋ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책에서, 망해버린 사명을 계속 밀고 나아가는 일을 정당화하는 그 정확한 문장을 찾아내는 것이 내게는 절박했다.
약간의 기만은 강한 정신력에 더 유익하다.
그러나
긍정적 착각은 견제하지 않고 내버려둘 경우 그 착각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공격할 수 있는 사악한 힘으로 변질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작가가 경고하고싶은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이 폭풍우는 짜증스럽기만 한 일일까? 어쩌면 그것은 거리를 혼자 차지할 수 있는 기회, 온몸을 빗물에 적셔볼 기회, 다시 시작할 기회일 수도 있다.
생각 노트
동경하고 존경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악인이었던 점에 대하여
내가 이 책을 추천해서 읽고 있는 직장 동료 분의 독서 과정을 들으면서 나의 독서 과정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분은 아직 이 책의 초중반까지 읽은 상태라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 대한 평가가 1차원적이다. 불굴의 의지를 가진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향해 달려가는 지독하게 멋진 인물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고, 그의 그런 면모를 표현하는 단어인 'Grit': 긍정적인 피드백이 없어서 기계처럼 어떤 일에 뛰어드는 의지나 능력을 나의 좌우명처럼 여기겠다며 개인 페이지의 맨 앞 부분에 적어두었다. 그런데 책의 중반부에 이르면서 룰루 밀러는 슬슬 그의 민낯을 보게되었고 결국 그는 잘못된 신념으로 우생학이라는 비인간적이고 어리석인 학문을 탄생시켰고, 인간을 생물 분류학의 꼭대기에 억지로 끌어앉히기 위해 물 속에 사는 생물들을 모두 '어류'라는 하나의 반죽으로 뭉개버려 놓고 정확하고 체계적인 분류학인 양 의기양양했다. 바보다.
이 책의 반전을 통해 내가 선이라고 확신하는 어떤 것이 오히려 악일 수도 있다는 의심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악에 대한 판단 뿐만 아니라 내 생각에 너무 강한 확신을 갖는 것은 위험하다. 내 생각이 잘못된 방향일 수도 있고, 지금 내가 확신하는 나의 감정이 손을 앞으로 휘-휘- 저으면 사라져버리는 연기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물고기, 어류라는 종을 인정해버리는 순간 우생학이라는 학문에 힘을 실어 어떤 특성을 가진 인간들이
모두 이 세상에 부적잡하다고 치부해버린다는 것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어류에 집착해서 물 속에 사는 모든 종을 어류로 치부해버린 것은 인간을 자신이 세운 종의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우겨넣고 싶은 인간 우월주의와 단순히 인간의 직관으로 판단하는 편리함 때문이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나중에는 이해가 안될 것 같아 부연 설명을 하자면, 어류라는 종으로 묶인 종들을 살펴보면 각각의 종들은 그저 '물 속에 산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을 뿐 어떤 종은 포유류에 가깝고, 어떤 종은 파충류에 가깝다고 한다. 즉, 물 속의 세상에 또 다른 종의 체계로 나눠졌어야 하는 것들이 '어류'라는 하나의 종으로 묶여버린 것이다. 그냥 무조건 인간의 특성, 그 중에 누가 선정한지도 모르는 기준이 우월하다는 그 말도 안되는 기준을 지키기 위해, 또 그냥 눈으로 보기에 물 속에 산다는 하나의 공통점으로 비늘을 가져서 비슷하게 생기게 되버린 외면이 인간의 직관으로 판단하기 편리했기 때문에 어류라는 개념이 생긴 것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도대체 어떤 자존감과 자기 확인을 가졌길래 자신이 속한 종이, 자신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 믿음으로 수많은 억울한 피해 (말도 안되는 기준으로 열등하다고 판단된 여자들을 강제로 불임화 하는 일 등)가 발생하고 (거의 확신하는) 살인까지 저지렀다. 그렇게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행동을 해놓고 일말의 반성도 하지 않고 세상을 살다 떠난 그가 부럽기도 하고 그 자신감이 신기하고 더럽다. 아무리 지금 그의 민낯이 밝혀졌다지만 살아있는 동안 빛나는 영광을 누린 그는 그저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사후 세계를 믿진 않지만 죽어서라도 꼭 벌을 받는 영혼이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진지하고 심오한 이야기를 담은 책을 2번이나 읽은 건 처음이다. 1회독과 2회독에서 느낌점은 대체로 비슷하지만 2회독을 할 때 훨씬 더 재미있었던 것 같다. 초반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멋지게 그려지는 모습이 얼마나 역겹고 코웃음이 나는지. 또 결코 완전하지 않았던 저자가 결국 책의 끝에서도 미생이라는 점이 이 책의 모든 줄거리에 좀 더 현실감과 신뢰성을 높여주었던 것 같다. 모든 인간은 실수를 하고, 또 앞으로도 실수를 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 인간이 완벽히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실수를 연발하고 그 실수 속에서, 또 그 실수를 극복하는 과정 속에서 배움을 얻는 미완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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